시와 놀기 썸네일형 리스트형 시인 문덕수 명시 모음 원에 대하여/문덕수 내 품안에 한 알의 씨로 묻혀 너를 닮은 과일로 익고 싶다 내 몸살의 칼날은 꽃잎이 되고 뾰죽한 내 돌부리는 만월처럼 깎이어 너를 닮아 차라리 타 버리고 싶다 외길로만 뻗는 이 직선을 휘어잡아다오 부러져 모가 나는 이 삼각을 풀어다오 윤곽이 아니라 그대로 가득찬 충실이기에 실은 우주도 너를 닮은 충실이기에 네 품 안에 떨어진 하나의 물방울로 바다처럼 넘치며 출렁이고 싶다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 문덕수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빗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쫓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 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 더보기 상수리나무의 비밀 ㅡ황상순 상수리나무의 비밀 / 황상순 물고기는 그냥 물고기다 원숭이는 그저 원숭이고 나무는 본시부터 나무였다 물고기가 땅에 올라 원숭이가 되지 않고 원숭이가 사람으로 사람이 나무가 될 턱도 없는데 그렇게 각자 스스로 존재하는데 어떤 이는 일체유심조, 세상 모든 게 다 마음이 지어낸 거라고 얘길 한다 오늘 상수리나무로 회귀한 한 사람 결을 지난다 팻말을 걸어두지 않았으면 이 은밀한 진화를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리라 시문학상수상(2022.12) 더보기 책상의 가족사ㅡ이기철 책상의 가족사 / 이기철 나와 이 소목상의 가족사는 오래 되었다 나는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는 법을 이 평면의 지형학에서 배웠다 그는 소파나 침대, 카우치나 장롱에 비기면 소품이지만 늘 지적인 그의 표정은 여타 장신구들과는 구분된다 처음엔 그는 부피가 작은 시집들과 교분을 쌓는가 싶더니 쇼펜하우어나 니체, 이광수 전집을 알고 난 뒤부터는 그의 얼굴에 자못 세계의 기류들이 흘러갔다 그는 우수와 사색을 즐기면서도 첨단과 도파민과 파안대소는 사양했다 내가 천추로 가는 길을 물을 때면 그는 자못 진지한 얼굴이 되어 쓰세요 쓰세요, 당신의 가장 아픈 말과 쓰린 상처와 슬픔이 밴 자줏빛 추억을, 하고 귀엣말로 대답했다 그리하여 나는 세기의 그늘이 드리워진 이 작은 공간 컴퓨터가 점유해버린 사각의 평면 위에 연필과 볼.. 더보기 미역귀 ㅡ 성영희 미역귀 / 성영희 미역은 귀로 산다 바위를 파고 듣는 미역줄기들 견내량 세찬 물길에 소용돌이로 붙어살다가 12첩 반상에 진수로 올려졌다고 했던가 깜깜한 청력으로도 파도처럼 일어서는 돌의 꽃 귀로 자생하는 유연한 물살은 해초들의 텃밭 아닐까 미역을 따고 나면 바위는 한동안 난청을 앓는다 물의 포자인가, 움켜진 귀를 놓으면 어지러운 소리들은 수면 위로 올라와 물결이 된다 파도가 지날 때마다 온몸으로 흘려쓰는 해초들의 수중악보 흘려쓴 음표라고 함부로 고쳐 부르지 마라 얇고 가느다란 음파로도 춤을 추는 물의 하체다 저 깊은 곳으로부터 헤엄쳐 온 물의 후음이 긴 파도를 펼치는 시간 잠에서 깬 귀들이 쫑긋쫑긋 햇살을 읽는다 물결을 말리면 저런 모양이 될까 햇살을 만나면 야멸지게 물의 뼈를 버리는 바짝 마른 파도 한 뭇 더보기 정서진 노을 오십과 육십 사이 / 임경순 정서진 노을이 보여주는 세상 건너는 법은 그때그때 다르다 스무 살 즈음엔 섬에서 섬 사이 조각배를 젓는 중이고 서른이 넘으면 여울 깊은 강물 헤엄치는 일이며 마흔에는 산꼭대기 출렁다리를 건너는 것이란다 오십에서 육십은 너와 나 사이에 놓인 섬 강물 출렁다리를 수없이 오가는 중이라며 불콰해진 구름이 오늘따라 석양주를 권하고 있다 더보기 두번은 없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번은 없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두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그럴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ㅡ바보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번도 없다. 두번의 똑 같은밤도없고 두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이제.누군가 내곁에서 내이름을 큰소리로. 불렀으면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때 난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습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 더보기 노자의 시창작 강의 / 이진우 노자의 시창작 강의 / 이진우 아름답다 말하는 시는 추하고 한목소리로 좋다는 시는 나쁘다 한눈에 읽히는 시는 믿을 수 없고 믿으라는 시는 두 번 읽히지 않는다 착하다고 시를 잘 쓰는 것이 아니고 시를 잘 쓴다고 착하지 않다 지혜롭다고 시를 많이 아는 것이 아니고 시를 많이 안다고 지혜롭지 않다 시를 아는 이는 시를 말하지 않고 시를 말하는 이는 시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시를 쓸 때는 작은 생선 굽듯 조심하라 힘주고 싶을수록 낮추거나 감추고 뽐내고 싶을수록 뒤로 물러나며 작고 하찮은 사물을 크게 보고 적고 힘없는 사람을 높이 여기며 어려운 표현은 쉬운 단어에서 찾고 복잡한 상황을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하며 모두가 욕심내지 않는 것을 욕심내고 모두가 배우지 않는 것을 배워서 사람들이 잊고 사는 진실을 드러내라.. 더보기 나무 학교 / 문정희 나무 학교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푸른 나무 사이로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 놓을 때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서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 지기로 했다. 더보기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