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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답게 나답게

숨은 벽 / 임경순 숨은 벽 / 임경순 백운대 인수봉 사이 간절함이 숨어 있다 여름 끝 가을 문턱 사이 그리움이 숨어 있다 깊은 계곡 징검돌 사이 망설임이 숨어 있다 갈참나무 졸참나무 사이 긴 포옹이 숨어 있다 칡꽃 달맞이꽃 사이 짧은 입맞춤이 숨어 있다 앙상하기 그지없는 나무뿌리 무엇을 들킨 것인지 심장 속 응어리로 박혀 숨 쉴 때마다 결린다 바람에 살 점 물어뜯기며 까마득히 숨어 있는 저 벽 침묵으로 말하면서 더보기
섬의 지문 ㅡ임경순 섬의 지문 / 임경순 김영갑 사진속 중산간 오름들은 태풍주의보로 더 크게 숨을 몰아 쉰다 소리지르고 싶었던 순간들 삼달초등학교에 머물러 두모악 풍경을 붙들고 있다 저승 돈을 벌어다가 이승의 자식을 먹여 살리는 해녀의 숨비소리 어차피 바다에서 죽을 사람은 바다에서 죽고 집에서 죽을 사람은 집에서 죽는다고 테왁을 칠성판처럼 등에 진다 여린 감나무잎 사이 묵은 감꼭지로 달려있고 싶던 마라도 파도 한숨이 들어있는 자장면을 검게 비빈다 또 한그릇 섬이 비워진다 암미역 숫미역은 파도의 갈비뼈 4월이면 찾아오는 통증으로 몸서릴 친다 수얘기*들 끼룩끼룩 섬의 지문을 지우며 지나간다 *남방큰돌고래 더보기
사랑 사랑 / 임경순 'ㅅ' 사람은 혼자서 열 수 없는 문이 있죠 'ㅏ' 밖에서 열어 주어야 하거든요 'ㄹ' 생각의 무릎을 꿇고 마음을 숙여야 'ㅏ' 문이 열릴 수 있어요 'ㅇ' 맞나요?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을 듯 더보기
숨은 벽 서문ㅡ함동선 자연의 이법理法을 인식한 내면풍경 咸東鮮 (시인,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단테가『신곡神曲』을 쓸 당시의 이태리는 기독교와 교회가 학문 문학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라틴어가 공용어, 학문어, 문학어였다. 이 때 그는 『속어론俗語論』에서 시란 유모한테서 배운 말로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훗날 낭만적 비평의 배아가 되었다고 한다. 또 한 분의 용기 있는 시인이 있다. 영국의 워즈워스 시인이다. 그는 코울리지와 공저한 『서정민요집』의 머리말에서 시는 왕, 귀족, 도시인이 쓰는 말보다 백성이 쓰는 쉬운 말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이 선언은 영국의 낭만주의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그가 젊어서 관심을 두고 참여했던 프랑스 혁명과 맥을 같이 한 문학혁명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첫 시집 『숨은 벽』을.. 더보기
50과 60사이ㅡ유승우교수 정서진 노을이 보여주는 세상 건너는 법은 그때그때 다르다 스물 즈음은 섬에서 섬 사이 조각배를 젓는 중이고 서른에는 여울 깊은 강물을 헤엄치는 일이며 마흔에는 산꼭대기 출렁다리를 건너는 것이란다 오십에서 육십은 너와 나 사이에 놓인 섬 강물 출렁다리를 수없이 오가는 중이라며 불콰해진 구름이 오늘따라 석양주를 권한다 - 임경순, 「50과 60 사이」 전문 인간을 가리켜 작은 우주宇宙라고 한다. 이 우주의 우宇는 공간이고, 주宙는 시간이다. 인간은 공간과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육신이고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은 마음이다. 다시 말해 육신은 공간에 존재하는 시각적 이미지이고, 마음은 시간에 존재하는 관념적 이미지이다. 임경순 시인은 “정서진 노을이 보여주는/ 세상 건너는 법은 그때그때.. 더보기
고양이 / 임경순 고양이 / 임경순 누구나 닥칠 일인걸 단지 내 차례가 되었을 뿐 밤의 냄새를 머금고 무릎에 앉는다 피부를 뚫고 나오려는 슬픔을 밤새 봉합하느라 기운을 다 써 버린 새벽 꼬리만 천천히 움직인다 암이 생각까지 파고든 그녀 떠오르는 것이 많을수록 검불데기로 마른 억새꽃으로 흔들린다 가릉가릉 다리를 감으며 맴돈다 유심히 다음에 또 보자고 지하도로 내려가는 등 뒤로 태연을 가장한 시선들이 촘촘히 박힌다 현관문 들어서자마자 무너질 목을 꽂꽂히 세우지만 정신을 지배할 시점을 찾느라 내려야할 전철역을 지나친다 지독한 시간이 지난다 신음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무심히 털을 고르는 눈빛 섬세한 위로를 받는다 더보기
훔쳐보는 일기 / 이영란시인 11. 10(목) 시계가 날 때리기 시작하면? 시인의 예쁜 목소리와 얼굴을 닮은 시집을 받았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시집을 펼쳤다. 어제 좋은 사람들과 갔던 바닷가 카페가 솔솔 떠올랐다. 좋은 사람들과 좋은 추억을 가져온 나는 한동안 좋은 마음으로 가을을 보낼 것이다. 바다처럼 파란 시집 겉표지가 그녀처럼 신선했다. 시를 읽는 내내 나는 언제 이런 시를 쓸까,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누군가를 부러워한다는 건 나에게도 할 수 있다는 힘을 안겨주기도 하는 것 같다. 시를 읽는다는 건 문장과 문장 사이를 오가며 시인의 마음을 혼자 상상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 마음속으로 들어가 거기 살짝 앉아보기도 하는 것이다. 50대 마지막 가을을 보내는 나에게 다가온 시는 ‘오십과 육십 사이’였다. 스무 살 즈음엔 섬.. 더보기
섬의 지문 / 임경순 섬의 지문 / 임경순 김영갑 사진속 중산간 오름들은 태풍주의보로 더 크게 숨을 몰아 쉰다 소리지르고 싶었던 순간들 삼달초등학교에 머물러 두모악 풍경을 붙들고 있다 저승 돈 벌어다가 이승 자식을 먹여 살리는 숨비소리 어차피 바다에서 죽을 사람은 바다에서 죽는다고 테왁을 칠성판처럼 등에 진다 여린 감나무잎 사이 묵은 감꼭지로 달려있고 싶던 마라도 파도 한숨이 들어있는 자장면을 검게 비빈다 한그릇 섬이 비워진다 암미역 숫미역은 파도의 갈비뼈 4월이면 찾아오는 통증으로 몸서릴 친다 수얘기*들 끼룩끼룩 섬의 지문을 지우며 지나간다 *남방큰돌고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