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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시집 [시계가 날 때리기 시작해요] 임경순/시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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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기호놀이로 포착하는 유쾌한 세상 재미난 인생
양 병호 <시인, 전북대 국문과 교수>


#. 마음의 놀이터, 시, 상상의 놀이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금의환향한 운동선수는 필수적
으로 인터뷰를 한다. 그리고 상투적인 질문을 받는다. 금메달
을 따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했나요? 기자는 숨은, 불굴의, 비
상식적인, 눈물겨운, 악전고투의, 인간적인, 처절한, 가십성, 특
종의 답변을 기대한다. 이럴 때 경지에 오른 선수는 능청스럽
게 대답한다. 그래요. 저는 다만 훈련과 경기를 즐겼을 뿐이에
요. 기자의 기대와 예측을 배반한 매우 이상적이고 모범이 되
는 답변이다. 물론 저간의 사정은 다르고, 다를 것이고, 달라야
한다.
어찌 보면 즐길 줄 아는 것 자체가 진짜 실력이다. 즐기는
법을 연마하는 것이 기술과 체력을 수련하는 것보다 더욱 어
렵기 때문이다. 성과를 향한 과도한 기대와 욕망이라는 심리를
조절하기는 쉽지 않다. 선수는 과잉심리로 인한 긴장 때문에
경직되어 경기를 유연하게 풀어나가지 못한다. 하여 요즘 운동
을 지도하는 감독들도 선수들에게 대체로 즐기라는 강령을 하
달한다. 아아! 그런데 노력하는 것보다 즐기는 법이 더욱 어렵
거늘...... 일찍이 공자도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
者(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 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
기는 사람만 못 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서두에서 ‘즐기라’는 운동 경기의 법칙을 장황하게 언급하
는 이유는 임경순 시인의 작시 행위가 마치 언어 기호를 가지
고 자유롭게 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시를
쓰기 위하여 긴장되거나 경직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마
도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즐겁기 때문인지 모른다. 여하튼 즐
겁게 보인다. 그 즐거움의 배태는 역으로 시 쓰는 과정이나 행
위를 놀이로 인식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시를 하나의 놀이로
보는 하우징아의 견해를 증명하는 적절한 예시로 보아도 무방
할 지경이다.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놀이하는 인간)』에서 “시의 창조는 놀이이다”라고 주
장한다. 말하자면 시를 쓰는 것은 정신의 놀이이고, 상상력의
놀이이고, 마음의 놀이라는 것이다. 또 놀이는 행위자의 자발
성, 무사무욕의 특성, 일정한 규칙성을 지니고 있다. 임 시인의
시는 세계와 삶에 대한 깨달음 혹은 교훈적 가치를 별로 강하
게 드러내지 않는다. 말하자면 삶과 세계를 응시하는데 무사무
욕의 시선을 유지하려 애쓴다. 시를 통해 누군가/독자/자아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시 쓰는 행위 자체를 그저 무욕의 자세
로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작시의 목적성이나 의도
성을 전면에 강하게 내세우지 않는다.
한편 발레리(Paul Valery) 역시 “시는 말을 가지고 노는 행
위”라 말한다. 예컨대 시는 신성한 놀이이지만 그 거룩함 속
에서도 특유의 즐거움, 분방함, 환희, 쾌활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임경순의 시에는 즐거움, 분방함, 환희, 쾌활함의
정조가 충만하다. 그의 시에는 밝고 맑고 유쾌한 시 정신이 출
렁거린다. 아마도 현대시의 놀이정신을 담보하는 농담, 유머,
실없는 소리, 과장법, 허풍, 과대망상 어법 등의 사용으로 보인
다. 아울러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낙관적, 낭만적, 낙천적, 긍
정적 가치관과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또 그의 시에 빈번하게
활용되는 의인화 은유 때문이기도 하다. 의인화는 시의 기본적
인 은유로써 신화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실을 벗어나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신화는 마음의 놀이를 증강
하는 대표적 촉매이다.
임경순은 기호놀이를 통해 세상을 유쾌하게 읽어내고, 상쾌
하게 만들고, 쾌활하게 즐기기까지 한다. 나아가 작시행위 놀
이를 통해 인생을 재미나게 읽어내고, 흥겹게 만들고, 신명나
게 즐긴다. 좀 놀 줄 아는 시인이다. 그렇다. 임경순은 호모루
덴스이다. 그의 시는 자유로운 언술의 특징을 보인다. 정해진
주제에 대하여 자유롭고 활발한 상상력의 전개를 보인다. 시상
의 전개가 활달하고 거침이 없다. 특히 경쾌하고 발랄한 어법
의 채택으로 유쾌한 시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예컨대 임 시인
은 쾌활한 위트와 유머를 통해 언어로 놀이를 즐기는 데 골몰
하는 천진한 아이와 같다.
임 시인은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을 통해 인간
사의 한 국면을 순간적으로 포착하는 데 능숙하다. 그는 시의
메시지를 통해 인생의 교훈을 전달하는 고답적인 태도를 벗어
나 삶의 유의미한 순간을 포착하여 생의 희열, 만족, 기쁨, 경
탄을 형상화 하려는 의도를 보인다. 이러한 목적을 위한 작시
법의 특징 중 대표적인 것이 활물화이다. 그는 사물에 유정성
을 부여하여 인간화 하는 상상력을 빈번하게 드러낸다. 이 활
물 은유는 매우 감각적인 이미지 조성으로 구체성과 진정성을
확보한다. 이러한 인지 특성은 시인의 온정주의 태도가 투사된
것으로 보인다.


#. 관념을 감각으로 가지고 노는 놀이정신
책은 경험을 함부로 널어놓은 관념의 헛간이다. 책은 지식
을 담가놓은 발효 항아리이다. 책은 정신을 켜켜이 쌓아놓은
나뭇간이다. 책은 영혼을 박제해놓은 퇴락한 박물관이다. 책에
기록된 언어는 당분이며 날카로운 표창이다. 책은 지혜가 샘솟
는 우물이다. 책은 엄숙한 분위기를 강요하는 도서관이다. 책
은 출간되는 순간 고루한 기성관념이 된다. 책은 책 밖으로 나
갈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책은 두부 찍듯이 생각을 정형화
한다. 책은 질문을 허여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읽기만 종용한
다. 책은 유익한데 졸음을 투여한다. 책은 신성하면서 동시에
불온하다.
임경순 시인은 책과 놀기를 좋아한다. 책은 교조적이고 경
건하고 엄숙하고 치밀하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다. 그래서 책
은 가까이하기 어려운, 피곤한, 좀 지겨운, 유익한 친구와 같
다. 결정적으로 항상 근엄한 표정으로 옳은 소리만 내뱉기 때
문에 싫다. 그런데 시인은 책과 다정하게 놀기를 좋아한다. 심
지어 책으로 요리를 한다. 그리고 맛나게 먹는다. ‘책’은 시인
의 상상력을 발동시키는 주요한 원재료이다. 책은 시인이 활발
하게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다. 시인은 책과 더불어 정신의 유
희를 즐긴다.


맨손으로 집어 먹기 좋은 책장고


냉기로 소름 돋을 때
따뜻한 시집 한 그릇을 비우고
조곤조곤 설득하는
책 한 잔을 마셔야 한다


막 버무린 겉절이를 먹다가
묵은지는 당분간 손이 가지 않는 법


소포로 배달되는 것들
넘길수록 속은 촉촉 겉은 빠삭하다


뚜껑 한 번 열어본 적 없는 고전문학전집
오래 묵은 오크통을 개봉한다


바이칼 호수에 사는 물고기 한 권을 굽고
바이블에 뜸이 든 한 구절 주걱으로 푼다


요정의 고리에 걸린 버섯 속갈피를 탐하다
눈은 오래 모래알을 씹는다


-「책식주의」 전문


채식주의는 일종의 편식주의이다. 육식을 거부하는 저항운
동이다. 야만적 욕망을 과도하게 억압하는 테러이다. 살생유택
이라는 금언을 실천하는 숭고한 정신이다. 건강이라는 목표를
향하여 과감하게 식단의 균형을 파괴하고 채소만을 사랑하는
편향주의이다. 범우주론적 사랑을 실천하는 휴머니즘이다. 동
물 카테고리의 자유와 평등을 주창하는 애니멀리즘이다. 어쨌
든 채식주의는 자기절제의 파르라니 슬픈 수도승 분위기를 풍
긴다.
‘책식주의’는 ‘채식주의’를 패러디한 용어이다. 책식주의는
채식주의를 투사한 언어유희이다. 책식주의는 채식주의 정신
을 흠모한다. 책식주의는 채식주의 사상을 조롱한다. 책식주의
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허무맹랑한 탁상공론이다. 책식주의는
책장을 넘기며 지나온 유년기 소년기 청년기의 풍광을 암울하
게 환기한다. 책식주의는 책을 통해 사랑을 배운 고독한 방랑
자의 경전이다. 책식주의는 먹물들의 인생교본이다. 책식주의
는 책만을 애호하는 편향된 에고이즘이다. 책식주의는 희미한
추억을 떠올리고 또 지운다.
이 시는 책을 음식으로 변용하여 인지한 상상력이 지배소
로 작동한다. 책은 지식을 기록한 사물로부터 다양한 먹을거리
로 물성이 변화한다. 그 변용된 상상력은 활발하고, 거침없고,
따뜻하고, 천진하고, 당돌하고, 낭만적이다. 책으로부터 출발
하여 자유로운 연상놀이를 통해 맛있는 음식으로 전이되는 사
유작용이 재미있다. 시인은 상상력 놀이를 하고 있다. 놀이에
는 목적성이 결여되어 있다. 아니다. 목적은 오로지 재미이다.
재미를 보기 위하여 언어 기호를 가지고 재미나게 놀고 있다.
유사성(analogy)의 재미를 위하여 언어를 장난스럽게 오락적
으로 활용한다. 그리하여 시는 놀이가 된다.
책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먼저 냉장고를 변용한 “책장고”
에 다양한 책/음식들이 저장되어 있다. “시집”은 국밥 정도로,
또 다른 책은 음료수로 변이된다. 이 변용된 책/음식들은 모두
“따뜻한, 조곤조곤”의 꾸밈을 통해 긍정적 의미 가치를 획득한
다. 또 책은 “겉절이”와 “묵은지”로 탈바꿈된다. 김치가 숙성
하고 발효하는 시간의 차이를 통해 책의 정보 혹은 내용의 깊
이를 비교적으로 제시한다. 그럴듯하다. 매급시 재미있다. 또
택배로 주문받은 책/빵은 “겉빠속초”의 이상적 상태를 잘 유
지하고 있다. 책을 음식으로 치환한 상상력의 멤버 유지(yuji)
가 잘 되고 있다. 그냥 재미있다.
가난한 대학 시절. 헐벗고 굶주린 기억이 몽상몽상 피어오
르는,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계절. 굶주림은 견딜 수 있으나
고상한 교양은 포기할 수 없어 장만한 “고전문학전집”, 한국현
대문학전집, 그리고 아아 포켓판 삼중당문고 시리즈가 지금의
‘나’/자아를 길렀지 싶다. 역설적으로 책꽂이에 버려져 장식 기
능만을 하던 전집의 책들은 “뚜껑” 열리길 포기한 “오크통”으
로 은유 된다. 화자는 책장에 쌓인 추억의 먼지를 털어내고 오
랜만에 과거의 시간을 개봉한다.
그리하여 청춘 시절을 버텨온 “바이칼 호수”와 “바이블”의
환상을 요리하여 다시금 밥상을 차린다. 마침내 지나와버린 시
간의 주방에는 “물고기 한 권”과 “뜸이 든 한 구절”이 소박한
밥상으로 차려진다. 이 회고 취향의 습벽은 “요정의 고리”에
갇힌 운명처럼 죽을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것은 현실을 벗
어나 상념의 자유를 추구하는 탐욕이다. 그러나 화자는 이러
한 운명이 “모래알을 씹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필수적
으로 동반할 것임을 안다. 이 시는 책과 관련된 체험과 기억을
음식으로 변용하여 상상하는 놀이의 재미를 선사한다.


삶들이 갈피에 매장된다
일련번호가 덧씌워진 빼곡한 틀
묘비명을 훑어본다


시인 소설가를 비롯하여
장르별로 봉인된 이름들
얇거나 두꺼운 유서가 될 것들이
바코드 염을 마친다


빛바랜 고전부터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구구절절한 것들이
때때로 며칠씩 외출을 감행하여
재해석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베스트셀러의 폼나는 띠지
어쩐지 수의로 변해버린 모호한 표정
조화 한 다발 없는 묘지에
조용히 나를 묻고 싶다


-「공동묘지」 전문

사람의 이름은 자의적이다. 아니 언어 기호 자체가 본질적
으로 자의성을 띤다. 그런데 이름의 자의성이 운명이 되거나
지침이 되거나 상징이 되어 결국 필연성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하여 이름을 명명하는 행위는 그 사람의 미래와 운명에 영향
을 끼치는 매우 숭고한, 심중한, 위험한 작업이다. 이 시의 이
름/제목 “공동묘지-도서관”은 작시 의도와 본문의 의미에 심
각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예컨대 ‘도서관은 책들의 무덤이다’
라는 개념은유를 환기하고 은근히 주장한다. 이는 책 혹은 관
념에 대한 부정적 태도일 수도 있고, 지식의 유효성에 대한 회
의이기도 하다.
시인은 책들의 공동묘지인 도서관을 찾아가 어슬렁거리며
작가들을 참례하거나 아니면 묘지의 내부를 찬찬히 힐끔거린
다. 먼저 책을 쓴 작가의 삶이 책갈피에 묻히는 것을 포착한다.
아니 작가가 포착한 타자의 삶이 정형화/편견화/도식화되는
것을 알아챈다. 그것은 마치 가장 추상적인 기호인 익명의 숫
자/“일련번호”로 누군가의 질서/“틀”에 본의 아니게 편입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아 그래서 책은 결정적으로 “묘비명”이다.
책은 작가의 죽음이다. 아니 글을 읽는 독자의 죽음이다. 삶은,
세상은 무정형으로 변화하는데, 책은 출판되는 즉시 고정되고
정형화되기 때문이다.
책들/작가들이 사서의 엄격한 틀에 의하여 질서정연하게
점호를 받는 도서관은 장례식장으로 은유된다. 장례식장에서
는 장르불문, 사연불문, 직업불문, 귀천불문, 남녀노소불문 모
두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 죽음에 이르면 모두 공평하게 “봉
인”/소멸의 과정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장례의 과정 역
시 삶의 사연/“유서”이야 어떻든지 간에 모두 “바코드”/익명
화의 의식을 밟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숭고한, 정형화된, 슬픈,
후련한 “염”을 마쳐야 한다. 삶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소멸의
과정에서도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생성과 소멸의 법칙, 혹은 생로병사의 과정은 고전주의 시
절부터 지금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까지 인류에게 허여된 인
생의 본질이다. 책에 “구구절절” 기록된, 표현된, 표상된, 곡해
된, 위장된, 기억된, 고정된 우여곡절은 언제나 독자에 의해 새
롭게 “재해석”/변형되어 살아간다. 책은 독자의 오해와 곡해에
의해 새롭게 거듭난다. 책은 이해되고 요해되는 순간 고정되고
결국 사망선고를 받는다. 심지어 “베스트셀러”의 화려한 의장/
명성조차 이해되는 순간 “수의”를 입는다. 베스트셀러가 누리
는 당대의 명성도 시간이 흘러 독자의 가치관/인생관/세계관
이 바뀌면 “모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책/인생이 사망하면 모두 도서관/공동묘지로 끌려가 영원
한 안식에 든다. 이것은 살아 있는 것들의 운명이자 회피할 수
없는 순리이다. 시인/화자는 “조화”/감정/기억/추념 없이 완전
하게 사라지고 싶다. 완전사망을 꿈꾼다. 절대소멸을 소망한
다. 마지막 연에서 책은 존재로 변용된다. 이어서 존재는 인생
을 함의한다. 말하자면 화자와 책과 존재는 동일화되어 시의
중층성을 확보한다. 이 시는 책과 인생, 도서관과 공동묘지를
결합시킨 상상력이 경쾌하고 발랄하다. 이는 화자의 발화 태도
가 유머러스하고 소탈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삶과 세상을
재미나게 바라보고 싶은 자세 때문이다.
#. 유년, 가족사, 고향의 기억은 재미난 사색놀이
과거는 추억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빛바랜 앨범이다. 추억
은 ‘나 때는 말이야’로부터 시작해야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
‘라때’에는 분명한 자긍심과 희열과 자만심과 독선과 엉뚱함
이 섞여 있어야 재미있다. 유년의 추억은 맑고 신선하다. 그 청
량한 맛으로 유년의 추억은 흐뭇하다. 유년의 시간은 책임감
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놀고, 웃고, 떠들고, 즐기고, 노래하고,
울다가 잠들면 하루가 간다. 오로지 내일을 여는 희망만이 존
재한다. 미래를 향하여 무조건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아직 뭔
가로 굳어지지 않았다. 그 무언가가 되지 않았다. 아직 정형화,
도식화, 틀이 지워지지 않았고, 편견, 고집, 독선을 부릴 줄도
모른다. 상습적 패배에도 상심할 줄 모른다. 한바탕 울고 나면
좌절도 절망도 비 온 뒤의 맑은 하늘이다. 그래서 유년의 추억
은 소슬한 아름다움이다.
기억은 흘러간 과거 시간을 복원하는 고고학이다. 과거의
자아를 재생하는 정신작용이다. 과거의 자아를 복구하는 필수
덕목은 미화이다. 뒤돌아보는 시선은 몽환적이어야 한다. 흐릿
한 풍광 속에 아름답게 빛나는 안개를 응시해야 한다. 안개 속
에는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가족의 삶이 흐뭇하다. 부모형제와
서로 부대끼며 살아온 가족의 삶은 순결하고 애끈한 흑백사진
으로 부각된다. 부모님의 생활 자세는 인생의 지침이자 이정표
로 작동한다. 온화하고 평화로운 유년의 기억이 미래로 밀고
가는 연료가 된다. 유년은 가족생활을 통해 사회 구성원으로
서의 역할을 수련하는 수습 기간이다. 뜨끈한 가족애의 습득은
휴머니즘으로 무장한 인간다운 참말로 인간다운 인간을 배출
한다.
과거를 회고하고, 추상하고, 기억하고, 재생하고, 회상하고,
사색하는 일은 결코 일이 아니라 신나는 놀이이다. 과거의 자
아를 복원하는 시간여행은 매급시 흥분되고 설레고 흐뭇하기
때문이다. 과거로의 추억 여행은 현재의 고통과 근심을 마비시
키거나 제거하는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과거를 추억하는
놀이는 은근히 흥겹고 재미난 놀이이다.


토란잎으로 떨어지는 작달비
큰바람이 고목을 흔드는


마중물 한 바가지로 펌프질하는
아궁이마다 생솔가지가 타는


가마솥에 눈물이 흐르고

이내 밥이 끓는


몽당 수수비가 봉당을 쓰는
늙은 암소가 울리는 워낭


소리, 소리는
불면의 서랍에 채록되어 있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 아기는
여전히 곤한 잠을 자는데
동요 밖에서 뒤척이는 무음의 시간


재생 버튼을 누른다
영상으로 전해지는 소리의 체온
뜨겁게 등줄기를 타고 내려간다


-「소리의 체온」 전문


제목 “소리의 체온”이 감각적이다. 과거 시간에 존재하는
소리는 무음이지만 명쾌하게 들린다. 흘러간 과거의 소리는 귀
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어야만 들린다. 그래서 추억을 저장
한 과거의 소리는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심리적 가상으로
존재한다. 그런데 소리에는 체온이 있다. 체온은 우선 따뜻하
다. 안고 싶다. 사람 냄새가 난다. 과거를 복원한 추억의 소리
에는 가족을 비롯한 사람들의 체온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 시간의 불투명한 추억을 발굴하는 데에는 청각과 피부감
각의 공조가 매우 효과적이다. 이른바 공감각을 활용하는 것이
다.
한 폭의 수채화 풍경이다. 습기 가득 머금어 눅눅한 바람이
동네 어귀 느티나무 고목을 쿨럭쿨럭 쏴아아 휘젓고 내뺀다.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고 지나간 뒤 “토란잎”에 “작달비” 떨어
지는 소리. 후두둑 후투툭 후툭툭. 그 장대비는 작둣물을 뿜어
올리려고 펌프질하기 위한 “마중물”처럼 반갑고 소중한 존재
이다. 부엌 풍경 또한 아슴아슴한 그림을 재생한다. 아궁이에
너울너울 불꽃을 일렁이며, 매캐하고 고소하고 눈물겨운 생솔
가지가 타는 소리. 치이치이 칙 투우투우 투둑 툭. 검은 무쇠
가마솥에 향긋한 밥 익는 냄새를 풍기며 “눈물”이 흐르는 소
리. 피싯 피식 도르르르르르. 곧 이어 밥 끓어 넘치는 소리. 브
글브글 뽁 부굴부굴 뽁뽁 뽁.
어머니의 노동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효심이 발동하여 고
사리손으로 쓸어내리는 몽당수수비질 소리. 씨가작 씨가작 쓰
윽 쓱쓱. 송아지 적부터 오래 같이 살아 식구나 다름없는 암소
가 허름한 외양간에서 한가로이 되새김질하며 귀찮은 파리를
쫓느라 연신 고갯짓할 때 나는 워낭소리. 달랑 딸랑 달랑 딸랑
달랑. 1, 2, 3연에서 재생되는 소리는 물이 계속 흐르듯, 미완
의 표현으로 서술되고 있다. 그러다 과거 시간을 복원하며 나
는 모든 소리가 4연에서 웅덩이에 물 고이듯 뭉친다. 그리하여
화자 기억의 “서랍”에 각인되고 있다. 결코 사라지거나 소실될
염려 없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채록‘되고 있다.
5연은 현실과 과거의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화자는 지나
와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러나 화자는
현재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추억만을 떠올린다. 행복했
던 과거와의 단절을 아쉬워하는 현재의 ‘나’의 소박한 심정이
표상되고 있다. 동요 “기찻길 옆 오막살이”는 가난하고 궁핍
하고 시끄러운 현실과 전혀 상관없이 태평하게 잠을 자는 천
진난만한 아기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이는 어른과 아기, 현실
과 이상, 복잡과 단순, 불순과 순수의 대비를 통해 “아기”의 행
복한 삶의 태도를 전경화 시킨다. 그런데 화자는 과거의 순수
하고 환상적인 동요를 떠나 현재의 가혹하고 현실적인 공간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하여 화자는 과거 행복했던 시간을 “재생”
함으로써 위안을 얻고 있다.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하는 일은 자아 정체성을 굳
건히 하도록 도와준다. 나아가 추억을 담보하는 “소리”의 재현
을 통해 과거를 여행하는 일은 낙낙한 위안으로 작용한다. 무
엇보다 과거, ‘라때’를 뒤적이는 일은 매급시 재미있다. 특히
살아온 시간을 풍부하게 저축한 기억 부자들은 순수하고 천진
했던 유년을 재생하는 일이 즐겁다. 유년 공간에서 받았던 따
뜻한 가족주의 온정의 세례는 ‘나’를 추동해온 연료였기 때문
이리라.


후미진 곳에 치워진 다듬이 소리
돌절구에 기댄 한쪽 발이 부러진 나무지게
누룽지가 될 때까지 불길 참아주던 부지깽이
벌써 팽개쳐 자취를 알 수 없는 빨랫방망이


몸빼바지 월남치마 폭 숨겨진 기억을
몽당 수수비가 앞마당으로 하나둘 쓸어 모은다


방과 마루를 나누던 좁은 문턱이
맨들맨들 윤기 나는 까닭을
봇짐장수에게 퍼 주던
쌀독 속 쪽박은 알고 있다


치워도 너저분한 오빠 방의 냄새
할머니부터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또 이름도 짓기 전 떠나버린 동생이
눈물 지도에 그려져 있다


행랑채 사랑방이 지어지면서
셋방살이로 들어온
해구 엄마와 뿔이 구부러진 암소가
한 지붕 세 가족으로 서로 마중물이 되었다……를 끝으로
샛 대문을 닫고 빗장까지 걸어 잠갔는데
밤새 울컥 게워낸 되새김질 소리는
도마에 찍힌 칼자국보다 더 자세하고 날카롭게
나열되고 있다


-「샛 대문을 열면」 전문


지나간 시절을 추억하는 재미는 기억력의 선명도에 비례한
다. 지나온 시공간에 차곡차곡 축적된 무수히 많은 사물, 사람,
관계, 사건, 에피소드 등은 생략되거나 숨거나 망실되기 십상
이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고 기억의 공간에 존재하는 추억의
요소들은 현재의 자아를 형성한 훌륭한 부품들이다. 과거를 유
지해온 기억거리들이 현존재를 구성하고 있다. 특히 유년의 가
족과 집에 대한 기억은 세계와 존재의 첫 만남이자 경험으로
써 원관념이 되어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농경문화의 전통을 누리며 살아온 기억들이 파노라마 풍경
을 전개한다. 농경 속에는 인간의 육체가 개입되어 있다. 근육
과 땀과 새참과 누렁소와 헛간과 물레방앗간의 노동과 휴식이
기억을 부추긴다. 육체와 관련된 기억은 생명력이 길다. 어두
운 밤의 뭉친 근육을 조곤조곤 두들기는 “다듬이 소리”는 아
득한 자장가였지 싶다. 과도한 노동으로 발목을 부상당한 “나
무지게”는 월남전 상이용사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슬프고도
애잔하고도 약간은 무서웠던 그런 복합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가마솥에 짚불을 때며 바라보는 휘황한 불꽃은 참말로 황
홀했었다. 사내가 부엌에 들락거리면 불알 떨어진다는 억지 협
박에 쫓겨나면서 가지고 나온 “부지깽이”는 강아지 워리를 귀
찮게 건드는 장난감이었을 걸. “빨랫방망이”는 야구 배트로,
쥐 잡는 창으로, 감 따는 도구로 용도가 다양한 살림살이였다.
가난한 어머니가 사계절 근무복으로 착용하던 “몸빼바지”는
동네 아니 전국의 어머니들에게 아마도 치열한 살림전투용 전
투복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시장이나 야외나들이 갈 때 오랜만
에 갈아 입던 “월남치마”는 눈부신 설렘의 성장이었다.
지금도 알 수 없는 금기가 있다. ‘문턱을 밟으면 재수가 없
다’라는 협박성 금언의 발생 의도는 무엇일까. 문턱을 자주 밟
으면 닳아지기 때문에 보수하기 어려워서일까. 아니면 문턱에
걸려 넘어지는 사고가 자주 발생하므로 경각심을 북돋우기 위
해서였을까. 그런데 지금은 문턱이 사라진 시대이기 때문에 궁
금증도 유효기간이 지나버렸다. 하여튼 물물교환의 산증인인
“봇짐장수”는 생필품을 조달해주는 상인뿐 아니라 다른 고장
의 희귀한 소식까지도 전달하는 통신원 역할까지도 수행했다.
냄새도 기억의 구성소이다. 그 시절에는 사실 샤워할만한
시설이 별로 없었을 뿐 아니라 몸의 청결도 그리 중요하게 여
기지 않았다. 오죽하면 학생들을 상대로 국가에서 손톱을 비
롯한 용의검사까지 했겠는가. 사람마다 독특한 체취를 개성적
으로 소지한 시기였을 것이다.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고 태어
나자마자 하늘나라로 소풍 간 “동생”도 최초로 별리의 슬픔을
알려준 존재이다. “눈물 지도”는 인간 모두가 마음속 깊은 곳
에 고이 숨겨놓은 비밀 일기장 같은 것이다. 인간의 심성을 순
결하게 정화해주는 기능을 담당하는 “눈물 지도”를 펼치고 원
초적 순수 공간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주거 공간이 부족한 시대에는 한집에 여러 세대가 함께 더
불어 살았다. 결혼하면 셋방살이부터 시작하는 것이 불문율이
었다. 셋방살이는 정말 슬프고, 억울하고, 불편하고, 눈치 보고,
방귀도 제대로 힘주어 후련하게 뀔 수 없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애환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러나 또 얼렁뚱땅 지지고
볶으며 어우렁더우렁 사는 재미도 보상으로 제공하였다. 심지
어 “해구 엄마”와 뿔이 “구부러진 암소”까지 한집에 사는 풍경
은 복잡다단한, 웃픈, 심오한 재미를 기억나게 할 것이다. 그러
한 옛날 유년 고향의 기억은 서정적인 “되새김질”로 울컥울컥
반복된다. 아주 선명하고 아릿한 기억으로 되살아난다.
#. 일상을 전복하는 섬세한 관찰과 언어기호놀이
사소한 감정과 울분과 희망과 상심과 좌절과 기대가 울퉁
불퉁 부침하는 일상은 설렘과 권태를 동시에 제공한다. 반복은
권태를, 변화는 설렘을 지불한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상은
권태롭지만 안정감을 준다. 안정감은 고임이고 퇴보이다. 권태
를 벗어나 딱딱한 마음을 설레게 하는 방법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물론 공간을 떠나는 여행과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으로
나뉜다. 마음의 여행을 떠날 때의 필수 품목은 상상력과 기발
한 발상이다. 정형화되어가는 일상을 혁명적으로 전도하여 응
시하는 날카로운 시선, 규칙과 반복 속에서 일탈과 변태를 찾
아내는 감식안이 필요하다.
임경순은 사소한 일상에 대한 정밀한 관찰로부터 의미심장
한 의도를 구축해낸다. 그의 시선에 포착된 일상은 단순하게
반복되고 요약된 현상 자체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현상의 이
면/내면에 존재하는 본질 혹은 특성을 압축적으로 추출 해낸
다. 사소한 현상에다가 심각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생성
한다. 달리 말하면 일상에다가 시성(poesy)을 투입하는 것이
다. 시성을 부과하는 임경순의 주요한 작시 방식은 치밀한 관
찰, 전도된 응시, 의인화 사유 등을 들 수 있다. 또 이미지 조성
과 시상 전개에 사용되는 언어 기호를 매우 자유롭고 발랄하
게 사용한다. 그에게 언어는 의미를 표상하는 기본적 도구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재미를 성취하려는 장난감으
로도 기능한다. 시인은 언어를 자유롭게 부리고 또 함께 노는
재미를 즐긴다.


시속 100km 고속도로에
쉼표가 앞장서고 줄임표 따라간다


어 어……
내 차 앞을 용케 지난다
노란 두 줄 넘는다 싶었
반대 차선 큰 짐 실은 트럭
속도가 무겁다


쉼표,
앞만 보고 뜀박질이다
쫑쫑 뛰는 줄임표


트럭이 질주한다
사이드미러를 본다
빨간 차 검은 중형차 뒤를 따른다
오금이 저리고 똥줄은 타는데
쉼표 줄임표 도로에서
보이지 않는다
.
.
.
도로 옆 오리 옹기종기 모여 있다


어미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던 육 남매
가시밭길 무사히 지나왔다 싶었는데
엄동설한 다시 맨발로
고속도로 중앙선을 넘고 있는 어머니


-「, ...... -오리 행진」 전문


오리가족의 엑소더스(exodus)가 긴박하고 스릴 넘치는 장
관으로 재현되었다. 어미오리는 쉼표, 새끼오리는 줄임표로 기
호화된다. 아니면 형태적 차원에서 시각화된다. 이러한 기호
놀이는 의미의 구축을 넘어 재미난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실
제로 자연환경에서 동물들의 숭고한 모성애의 발현 현장을 볼
수 있다. 어미오리가 본능적으로 새끼오리들을 몰고 보행하는
광경도 익숙하다. 오리가족이 어미의 모성애로 위험한, 위기의
상황을 극복하는 장면은 눈물겨운 감동을 준다. 이 시에는 오
리가족의 위기 상황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과 염려하는 마음
이 매우 긴박하게 묘사되고 있다. 그 리얼리티가 시적 긴장감
을 유발하고 지속시킨다.
고속도로에 오리가족이 저속으로 행진을 시작한다. 그것도
더딘 이미지를 지닌 쉼표와 줄임표로 기호화되어 행렬을 이룬
다. 위험하다. 위급하다. 화자에게 포착된다. 화자는 소리 죽인
아우성 “어 어……”를 신음처럼 내뱉는다. 화자는 다행히 오리
가족을 피해 지나간다. 중앙선을 넘었지만, 과속으로 접근하는
트럭이 더욱 위태롭다. 오리가족은 천재지변, 위기상황 극복
을 위해 필사적으로 달린다. 분명 죽기 아니면 살기의 극한 상
황이다. 이를 목격한 화자는 “오금이 저리고 똥줄은 타는” 심
리적 공황 상태에 이른다. 그런데 심지어 오리가족이 행방불명
이다. 길고 무겁고 음울한 침묵의 시간이 이어진다. 그 암묵의
시간을 대신하는 시행은 온점이다. 아니면 마침표일 수도 있
겠다. 암전이 끝나고 무대에 불이 켜지듯 오리가족은 “도로 옆
옹기종기 모여 있다.” 아름다운 다행이다. 그렇다면 침묵의 시
간은 마침표가 아니라 온점이었겠다.
마지막 연에서 오리가족의 엑소더스는 화자가 기억하는 어
머니에게로 전이된다. 인간 가족의 어머니들 역시 “엄동설한
맨발로” 식구들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 위험한 도로를 질주하
지 않았던가. 오리 떼의 모성애와 가족애가 눈물겨운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인류에게 동등하게 적용되기 때
문이다. 쉼표와 말줄임표가 가족이 되어 고속도로를 행진한다
는 발상과 기호놀이가 재미있다. 의미나 교훈보다 창의적인 스
타일과 형식이 더욱 감동이다.


징징과 버럭 사이
다양한 분노들이 빗발친다
쏟고 토해내도 점점 눌어붙는 앙금
바닥까지 빠각빠각 긁는다
분노 게이지는 언제나 기록을 깨고
고추장 먹은 칠면조로 푸드덕거리는 동안
두터웠던 것은 종잇장으로 팔랑거리고
말랑말랑한 것들은 딱딱하게 갈라진다
텅텅 비워진 너의 심통과 달리
내 속통에 꾹꾹 담긴 깡마른 기침
생목이 오른다
겉으론 웃기만 하던 울화통을
뒤집어엎는다


-「통기레쓰」 전문


‘라때’의 유머 한 토막. “쓰레기통을 뒤집으면 뭐가 될까요?
음 음 글쎄.............. 정답은 통기레쓰.” ㅋ ㅋ 시금털털하다. 엠
지세대가 들으면 허무유머라고 하겠다. 하여튼 이 시는 제목
의 쓰레기통을 글자만 뒤집은 것이 아니라 형태까지도 수직으
로 뒤집어 쓰레기가 쏟아지는 시각적, 심리적 효과를 강화하고
있다. 이 언어 장난/놀이는 심각하게 재미있다. 그런데 이 시
는 웃음을 제거하고 진지하고 심각한 은유를 사용한다. 예컨대
“쓰레기통은 인간이다” 혹은 “인간은 통기레쓰”이다. 이 시는
인간은 감정 쓰레기를 주워 담는 쓰레기통이라 말한다.
인간의 감정 표현은 의성어, 의태어가 매우 효과적이다. 기
호가 지시대상을 구체적이고 직설적으로 표상하기 때문이다.
의성어 “징징”과 의태어 “버럭”은 짜증이나 하소연, 분노와 불
화의 감정을 매우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이와 같은 불편한 감
정을 담고 있는, 담아야만 하는, 담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쓰레
기통과 같다. 수시로 급변하는 감정 쓰레기들을 비워내는 일은
중요한 생존조건이다. 그럼에도 비워지지/해소되지 않는 쓰레
기/감정은 말초신경을 “빠각빠각 긁는다.” 일상생활이 배출하
는 감정 쓰레기들로 하여 “분노 게이지”는 언제나 상한가를
찍는다.
마침내 스트레스/쓰레기로 포화 된 인간/쓰레기통은 “고추
장 먹은 칠면조”로 변모한다. 스트레스와 분노로 인해 이성을
상실하고 미쳐 날뛰는 이미지를 획득한 것이다. 각종 인생/감
정 쓰레기 때문에 부드럽고 온유한 성정은 무감각하고 비정한
성품으로 치환된다. 슬프다. 안쓰럽다. 현대인/도시인/직장인
의 초상을 보는 것만 같다. 마음의 쓰레기통에 담긴/버려진/방
치된 “감정 쓰레기”는 끝끝내 심통을 부린다. “텅텅”과 “꾹꾹”
의 의성어 대립은 해소와 억압의 대치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쓰레기통은 시상이 전개되면서 “심통, 속통, 울화통”으로
문맥의 의도에 걸맞게 변주된다. 이 변주는 단조로움을 제거하
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어찌 됐든 인간은 감정 쓰레기를 효율
적으로 분리수거한 다음 소각 처리/해소해야 한다. 주의할 점
은 환경 생태에 손상이 가지 않는 처리방식을 고안해야 한다
는 것이다. 가장 유효한 방식은 시인이 발상한 대로 쓰레기통
을 통기레쓰로 “뒤집어엎는” 것이다. 실없는 언어 기호 놀이의
기쁨은 감정쓰레기/스트레스를 퇴치하는 단방약이 될 수 있으
리라 믿으면서


#. 낯선 공간에서 설렘을 만나는 여행놀이


여행은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와 지루함으로부터 탈출하는
상투적이지만 유효한 방법론이다. 규칙과 반복을 벗어나면 자
유로운 감성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뛴다. 마침내 새로운
하루와 만난다. 하늘의 새소리도 오늘따라 흥겹게 지저귄다.
무심코 지나치던 길가의 코스모스도 오랜만에 수인사를 한다.
세상은 정물이 아니라 활물로 다가온다. 세계와 더불어 ‘나’도
살아난다. 살아 있다는, 살고 있다는, 살고 싶은 기분이 용솟음
친다, 어제와 내일은 배경이 되고 오직 오늘만이 전경이 된다.
여행은 자아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거대한 혁명이다.
여행은 상투와 관습으로부터의 탈출이다. 정형화되는 자아
로부터의 도피이다. 딱딱해지는 정신과 사유로부터의 망명이
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사물과 세계는 개안을 자극하고, 인식
의 죽비를 내려치고, 내면의 자아와 대화하도록 권유한다. 여
행은 휴가이다. 뭉쳐서 굳어진 정신의 근육을 이완시키는 기
회이다. 맘껏 게으름을 부리는 자유로운 날이다. 여행은 소풍
이다. 할 일을 내팽개치고 오로지 즐기는 데 골몰하는 나들이
이다. 여행은 정해진 궤도로부터의 일탈이다. 벗어나는 재미는
달콤하다.
여행은 사실과 현실로부터 떠나는 맛이다. 환상과 로망과
몽환을 향하여 직진하는 맛이다. 귀환을 전제로 떠나는 방랑이
다. 돌아감에 대한 망설임과 안도감이 갈등하는 떠남이다. 가
을날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배회하는 맛이다. 이리저리 떠
돌며 사랑과 인생의 궁극을 점검하는 공부이다. 자아를 직면하
여 의기소침 성찰하는 날이다. 존재론적 사색을 통해 왜소한
자아를 위로하는 날이다. 임경순은 여행을 다니며 이러한 무목
적성 기록을 남긴다. 여행은 거침없이 자유롭지만, 삶과 세계
를 응시하는 시선은 날카롭다. 여행의 재미를 만끽할 줄 알고
있다. 그는 여행 중 언어 놀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
다.


손에 잡히면
누름돌
돌팔매 돌
물수제비 돌


이리저리 표정을 바꾸다가
아슬하게 멈추는 돌의 생각
구르고 부서지는 것만이
수행은 아닐 터


윗돌
버팀돌
밑돌
뼈대로 버티는 아슬아슬한 소원들


어떤 이의 발에 채여
넘어지고 쓰러진다면
누군가 다른 꿈의 표정을
세워놓고 갈 테지


올려지기 전에는
무심코 돌
한사코 돌
하물며 돌


-「돌탑」 전문


돌탑은 기원의 상징물이다. 하늘에게 부치는 하소연의 편
지이다. 하늘을 향하여 솟구치고자 하는 욕망의 누적이다. 억
울한 지상의 꿈을 휘발시키려는 비손이다. 현실로부터 떠나고
자 하는 간절한 소망의 축조이다. 돌은 견고하다. 그러나 분리
되어 고독하다. 그 소외된 외로움들이 어깨동무하고 힘을 합쳐
대동놀이를 한다. 뭉쳐서 신성을 지향한다. 개별성이 무화 되
고 집단성을 획득하여 연합의 힘을 발휘한다. 그 뭉쳐진 힘으
로 돌의 원형인 바위를 아니 암반을 지향한다. 돌로써 돌탑을
이루는 과정을 언어로 축조하는 시인의 언어탑이 재미있다.
돌탑을 이루는 돌들은 손으로 집어 든 자의 의도에 따라 성
격이 형성된다. 인간도 소속 집단의 맥락 관계에 따라 기능이
나 역할이 결정된다. 돌은 선택한 자의 의도에 따라 “누름돌/
돌팔매 돌/ 물수제비 돌”로 명명된다. 돌들은 모두 고유한 독
자성을 획득한다. 1연 각 시행 말미의 “돌, 돌, 돌”들의 소리가
주체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따글따글하다. 이 돌들은 아무렇게
나 함부로 이리저리 살아가다가 문뜩 참선의 경지에 든다. 지
금까지 살아오며 “구르고 부서지는” 일만이 능사가 아니란 걸
깨닫는다. 해탈이다.
돌들은 개별성을 반납하고 집단성을 회복하는 깨달음에 이
른다. 돌은 던져지는 속성으로부터 버티는 속성으로 변성한다.
그리하여 “윗돌/ 버팀돌/ 밑돌”로 구조적 역할 분담을 한다.
이 돌들이 각자 역할을 담당하여 “소원”의 구조를 형성한다.
이 소원의 ‘돌탑’이 비록 우여곡절로 인해 허물어지고 사라진
다 해도 또 다른 “꿈”과 “소원”의 돌탑이 세워지리라 희망하고
기대한다. 마지막 연에서 탑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
기 전의 돌들은 “무심코 돌/ 한사코 돌/하물며 돌”로 부사어의
형용으로 시상의 의미를 압축한다. 그렇다. 원래 자연 상태의
개별적인 돌은 “무심코” 돌이었다. 이어 자신의 독자성과 고유
성을 확보하게 되면 “한사코” 돌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하물
며” 돌이 기원의 상징인 탑을 이루다니, 기특하고 존경할만한
경지에 도달한다. 이 시는 돌의 성격 규정, 돌들이 연대하여 탑
을 이루는 과정, 탑의 상징적 의미와 가치를 섬세한 관찰과 의
미심장한 언어 사용으로 재미나게 형상화하고 있다.


노랗게 물든 콩밭 언덕을 지나
주저리 익어가는 가을 산길을
실타래로 오래 돌려 감아야 다다를 수 있다


위로에 궁핍해지면 어디로든 스며들고 싶은 법
고삐를 풀어 버리고 여기에 오기까지
달력을 얼마나 떼어 냈던가


갈매기 떼 날개를 접는 횟집 창가에서
이마를 맞대고 우럭매운탕을 먹는다


삼형제 바위가 보이는 나오리 마을
단풍이 들고 싶었는지 파도는
감국이 피어 있는 조약돌까지
추릅 추르릅 적신다


여섬이 보이는 솔향기 길에
보랏빛 잔대꽃이 벙글어지자
바람은 쏜살같이 꽃향기 훔친다


돌아가야 할 것들이
정박해 있는 선착장
태안반도 10월 끝자락에 서서
눈으로 마시는 노을 한 모금
내일의 먼지를 털어낸다


-「만대항」 전문


가을의 항구. 지난여름의 청동색 햇살은 창끝이 무뎌졌다.
여름 모기도 침이 구부러진다는 가을 해변에 바람이 분다. 소
금기 가득 머금은 바람이 헐렁한 횟집 양철지붕을 건들고 심
심하게 지나간다. 무료한 고양이는 말라비틀어진 생선대가리
를 뒤집으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갈매기도 정박한 어선의
지붕에 앉아 하릴없이 졸고 있다. 허전한 항구. 이따금 차가운
물결이 밀려와 피서객이 모래사장에 써놓고 간 심심풀이 낙서
를 냉정하게 지우고 있다. 출항을 포기한 선부들은 낮부터 소
주를 불콰하게 들이켜고 낮잠을 마중하고 있다. 한가한 항구.
마음도 해찰하고 몸도 낙낙하다.
화자는 무르익은 가을날 “만대항”을 방문한다. 항구에 다다
르는 과정은 “실타래로 오래 돌려 감아야”만 가능하다. 항구로
가는 길의 이미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또 항구를 향하여 가
는 화자의 초조한, 긴장한 심리가 반영되었다. 여행을 떠난 동
기와 심리는 “위로”받고 싶은 심정 때문이다. 가을이면 누구나
매급시 외롭고 쓸쓸해져서 지향 없는 그리움이 돋아난다. 화자
는 외로운, 고독한 심사를 스스로 치유하기 위하여 여행을 떠
나왔다. 치료방식은 “고삐를 풀어버리고” 자유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자유를 향한 결심은 오랜 시간의 준비를 통해 이루어
진 것이다. 그만큼 간절하단 것이겠지.
가을 항구의 횟집. 창밖은 소슬하고, 청량한 풍경이다. 창안
은 쓸쓸하고, 푸근한 식탁이다. 파도는 가을 분위기에 동화되
어 노란 국화처럼 단풍이 들려고 매급시 조약돌을 채근한다.
“추릅 추르릅” 의성어는 조약돌을 적시는 파도소리이면서, 우
럭매운탕을 맛있게 먹는 소리이면서, 가을 여행을 떠나온 화자
의 후련한 심경을 표출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자아와 세계가
동일화되어 평화롭고 화평한 공간 분위기를 환기하다. 덩달아
“보랏빛 잔대꽃”과 “바람”도 “꽃향기”를 사이에 두고 재미나
게 장난치며 소통하고 있다.
그러나 떠나온 여행의 결말은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다. 어디론가 다시 떠나가야 할 존재들이 잠시 정박해 있는 가
을 항구. 마치 우리 인생의 구도 혹은 행로와 닮아 있다. 그래
서 “인생은 여행이다”는 개념은유가 성립되는 것인가. 화자는
바다로 떠난 가을여행에서 인생의 본질을 느끼고 있다. 가을날
태안반도 만대항 부두에서 저물면서 빛나는 노을을 마시고 있
다. 다가올 미래의 근심을 미리 지우고 있다. 그리하여 여행은
새로운 삶과 세계와 만나는 재미난 놀이이다.
임경순의 시는 경쾌하고 발랄하고 유쾌하고 따뜻하고 재미
있다. 그는 삶과 세계를 바라보는 긍정적 낙관주의 시선을 지
니고 있다. 온유한 응시를 통해 화평한 세계를 지향하는 낭만
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하여 임경순의 시는 삶의 체험을 통해

포착하는 생의 희열, 기쁨, 신비, 경탄, 비밀을 재미나게 표상
한다. 그는 시를 통해 교훈이나 목적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에게 작시행위는 무목적 지향의 순수한 놀이이다. 그는 시를
짓는 것이 아니라 시와 함께 놀이를 한다. 따라서 작시의 목적
은 순수한 재미이다. 이로 보아 임경순은 순수한 유미주의자이
다.
그는 순수한 재미를 추구하기 위하여 언어 기호를 가지고
논다. 언어 장난꾸러기의 자세로 재미를 발현하는 언어놀이
를 맛깔나게 시도한다. 발랄하고 쾌활한 유머와 위트는 물론이
고 언어유희 차원으로까지 나아간다. 언어와 함께 노는 시인의
상상력은 활발하고, 거침없고, 따뜻하고, 천진하고, 당돌하고,
낭만적이다. 이로 인해 그의 시에는 즐거움, 환희, 기쁨, 쾌활
함의 분위기가 충만하다. 임경순은 언어 기호 놀이를 통해 세
상을 유쾌하게 읽어내고, 상쾌하게 만들고, 쾌활하게 즐기기까
지 한다. 말하자면 재미나게 놀 줄 아는 시인이다. 그리하여 임
경순은 호모루덴스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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