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놀기
책상의 가족사ㅡ이기철
야생초향기
2022. 12. 14.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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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의 가족사 / 이기철
나와 이 소목상의 가족사는 오래 되었다
나는 사람과 세계를 사랑하는 법을 이 평면의 지형학에서 배웠다
그는 소파나 침대, 카우치나 장롱에 비기면 소품이지만 늘 지적인 그의 표정은 여타 장신구들과는 구분된다
처음엔 그는 부피가 작은 시집들과 교분을 쌓는가 싶더니 쇼펜하우어나 니체, 이광수 전집을 알고 난 뒤부터는
그의 얼굴에 자못 세계의 기류들이 흘러갔다
그는 우수와 사색을 즐기면서도 첨단과 도파민과 파안대소는 사양했다
내가 천추로 가는 길을 물을 때면 그는 자못 진지한 얼굴이 되어
쓰세요 쓰세요, 당신의 가장 아픈 말과 쓰린 상처와 슬픔이 밴 자줏빛 추억을, 하고 귀엣말로 대답했다
그리하여 나는 세기의 그늘이 드리워진 이 작은 공간
컴퓨터가 점유해버린 사각의 평면 위에
연필과 볼펜과 백로지의 시대를 그리워하며
창백한 몇 줄 시를 쓰는 것이다
세월이 철사처럼 녹이 슨 날
송구하여라, 이 보잘것 없는 내 율법의 작문책에
나는 시집이라는 화사한 이름을 붙여보기도 한다
문덕수 문학상 수상(202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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