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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식주의 / 임경순

야생초향기 2022. 11. 21.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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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식주의


제목들이 진설된 책장
맨손으로 집어 먹기 수월하다




삶이 온통 흔들릴 때
냉기로 소름이 돋을 때
따뜻한 책 한 그릇을 비우고
치우침없이 조근조근 설득해 주는
책 한 잔을 마셔야 한다

막 버무린 겉절이를 먹다가
묵은지는 당분간 손이 가지 않는 법
틈틈이 소포로 배달되는 것들
보낸 이의 세계관은 넘길수록
속은 촉촉 겉은 빠삭하다

수십 년이 지나도록 뚜껑 한 번 열어 본 적 없는
대학 때 라면값 아끼며 할부로 산 건축학전집
오래 묵은 오크통을 개봉할 때처럼
매력적인 향기가 배어나올지 모를 일이다

바이칼 호수에만 사는 물고기 한 권을 굽고
바이블에 뜸이 든 성경 한 구절을 푼다
오이라세계류 숲
요정의 고리에 걸린 버섯 속갈피를 탐하다
과식하는 밤
눈은 뻑뻑한 모래알을 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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