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벽 서문ㅡ함동선
자연의 이법理法을 인식한 내면풍경
咸東鮮
(시인, 중앙대학교 명예교수)
.단테가『신곡神曲』을 쓸 당시의 이태리는 기독교와 교회가 학문 문학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라틴어가 공용어, 학문어, 문학어였다. 이 때 그는
『속어론俗語論』에서 시란 유모한테서 배운 말로 써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훗날 낭만적 비평의 배아가 되었다고 한다. 또 한 분의 용기 있는
시인이 있다. 영국의 워즈워스 시인이다. 그는 코울리지와 공저한
『서정민요집』의 머리말에서 시는 왕, 귀족, 도시인이 쓰는 말보다 백성이
쓰는 쉬운 말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결국 이 선언은 영국의 낭만주의
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그가 젊어서 관심을 두고 참여했던 프랑스 혁명과
맥을 같이 한 문학혁명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첫 시집 『숨은 벽』을 상재하는 임경순任庚淳 시인과의 만남은
근 20년전, ‘전덕기 시인 문학관’에서였다. 무슨 행사였는지는 생각나질
않지만, 김민채 시인과 동행이었던 것 같다. 그의 시작품은 현대시의
서정보다 주지시 지향의 시의식이 드러나 있었다. 많은 시인의 경우
센티멘털리즘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나의 경우도 센티멘털리즘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고,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나의 문학 수업시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임 시인은 지성으로 제어된 견고한 이미지보다 그 나열을
보여준 것 같다. 그리고 얼마 후 정지용鄭芝溶이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함이 「시의 위의威儀」임을 깨달을 만큼 남다른 시적재능을 보여주기
도 했다. 그것은 감정의 넘침과 정서의 넘침을 견제하기 위한 자기방어였
던 것이다.
사람은 자연에서 배운다. 그래서 자연의 제자라 한다. 특히 갓난아이의
경우 동물 중에서 가장 여리고 약하다. 어머니의 태내에선 식물처럼 자라
다가 태어나면, 어머니의 젖을 먹지 못하거나 아버지가 돌보지 못하면 살아갈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갓난아이가 어머니한테서 배운 최초의 말은 그가
본 최초의 세계, 최초의 감각, 최초의 활동, 최초의 기쁨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임 시인은 어머니에 안겨 옹알이, 도리도리도리, 그리고 두
다리로 방아 찧으며 배운 말이 땅 속 깊이 뿌리 (「어머니의 시작법」)
내린 것을 인식한 시집 『숨은 벽』의 호소력은 각별한 것이다.
그는 자연에서 배운 어머니의 시작법을 한 이랑씩 갈면서 시를 처음 쓰는
것처럼 꾸미고 있다. 이렇게 꾸미는 것이 예술적 동기 설정의 하나이다.
이 인식의 세계가 바로 임 시인의 시안詩眼이고 의지인 것이다.
임 시인은 경기도 김포 출신이다. 넓은 평야지대다. 지금은 그곳이
서울의 위성도시와 전원을 어우른 전원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다.
나에게 김포는 남다르다. 내 고향은 연백이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후퇴
하는 국군과 함께 교동도를 거쳐 김포에서 하루를 묵었다. 90년대 중반,
‘김포 문예대학’ 이 개강할 때 초빙 교수로 3년간 문학 강의를 하였다. 그날
“우리의 문학사에 과문한 탓인지 김포 출신 문인이 없다. 앞으로 문학사에
남을 문인은 여러분이 될 것이다. 내가 통일이 되어 귀향하는 날은 이 김포를
거쳐 갈 것이다. 그래서 그 날이 기다려진다.”는 말을 한 일이 생각난다. 이
말은 임 시인에게 기대가 크다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도 우리는 단테가 말한 유모 또는 어머니가 가르친 자기나라 말과 워즈
워스가 말한 백성이 날마다 쓰는 쉬운 말로 시를 쓰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시는
유모 또는 어머니한테서 배우고, 백성이 날마다 쓰는 쉬운 말 모두가 시어가
되는 것일까. 원래 말은 사람의 의지와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실용적 도구다.
이 실용적 도구는 쓰면 쓸수록 단순화되고 단순화 될수록 실용적 구실을 한다.
이 경우 말의 영성靈性, 시원적 기능은 퇴화되고 전달하는 기능만 발달한다.
시를 처음쓰는 사람은 생활의 현상에서 보고 들은 일상어로 시를 쓴다.
시적 감동보다는 생활 감동을, 이미지보다는 신변의 일들을 짧은 말로 행을
나눈 작문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실용적 도구인 일상어로 시의 특수한 세
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런 의미에서 발레리는 “시인이 하는
일은 일상용도와 실용의 한 제품(언어)으로, 예외적이고 비실용적인 시라는
특수한 세계, 사물의 한 질서, 관계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시란 일상어를 시어로 승화시키는 과정임을 암시한다.
임 시인의 시는 자연의 이법理法을 희구하는 「어머니의 시작법」을 인식하고
삶을 자아화自我化한 내면풍경이다. 그가 문학수업과정에서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 한 시의 위의를 알아본 것은 앞으로 우리 시의 방향제시라는 점에
고무적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우리 시의 서정과 인간성 회복은 우리의 근원
적인 언어다. 하여 오늘날 우리 시의 서정은 현대만큼 확대되고 질이 바뀔 것
이다. 이것이 시의 존재론일지도 모른다.